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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서영(월간이리 월간이리 2014.4)

전문은 월간이리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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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월간이리에는 정서영 작가에 대한 간략한 인트로를 올렸었다. 

그 때 정 작가의 작업에 대한 감상을 다시 기고하겠다는 다짐을 했으나 한동안 잊어버리고 살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뤄놓은 숙제처럼 정서영 작가에 대한 부담은 항상 마음 한 켠에서 꿈틀거렸다.

그 이유는 물론 다시 감상평을 올린다고 내뱉어 버린 나와의 약속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동시대 미술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작가와 그 작업에 천작하여 그것들이 만들어 놓은 사유의 바다 속에 깊숙이 들어간다기 보다 그저 겉핧기 식으로만 해치우는 나의 미술감상 습관에 대한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동시대 (한국) 미술에 대한 접근을 위해서 정서영 작가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알게 된 것은) 참 행운이었다고 본다. 1990년대 이후부터 꿈틀거렸던 한국의 동시대 미술씬을 본격적으로 공론의 장으로 올린 작가 중에 한 명으로 평가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글을 쓰기 위해 정서영 작가를 다룬 주요 전시평과 전시자료, 미술잡지 기사, 그리고 서적 등을 섭렵하며 넓고 깊게 그를 이해하려 노력했다......라고 하면 너무 좋겠다! ^^;;

역시나 나라님도 못 고친다는 게으름으로 정서영 작가에 대한 책 '큰 것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에 집대성된 그의 전시작과 인터넷서핑으로 감상을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과정을 통해 나름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은 것은 당췌 해독이 불가능했던 그의 작업을 읽는 코드를 어렴풋하게나마 짚어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객관화되지 않은 어설픈 설레발인 백 퍼센트 나만의 길이다. 하지만 미술을 보는 나름의 길을 설정하고 작품 앞에 서게 되면 이해와 감상이 훨씬 수월하고 재미있기 때문에 설령 그것이 헛발질이라도 일단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자위와 행여 잘못된 길을 설정했더라도 다른 글과 정보를 통해 어느 정도는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는 소망으로 일단은 설레발을 시작하련다. 

정서영 작가의 가장 큰 매력은 신기하게도 친숙한 사물 앞에서 기존에 생각했던 그 사물의 본래 기능을 전혀 생각할 수 없게 한다는 데 있다. 

그것이 책상이던 세면대던 혹은 글자나, 글이던 간에 겉 모양새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능은 그의 작업에서는 자취를 감춘다. 

그렇기 때문에 정 작가의 작업 앞에서 어떤 사물이 보인다고 그 물체로부터 감상의 발걸음을 떼서는 자칫하면 길을 잃어버리기 쉬었다. 

예를 들면, 책상 앞에 마주했다(지금이 바로 그때, 2012). 그 책상은 공중에 떠 있다. 그리고 그 책상 위에는 흔히 말하는 책상 유리가 놓여있는데, 오른쪽 상단 귀퉁이에는 역시 우리가 흔히 하는 컴퓨터 선을 정리하기 위한 구멍이 뚫려있다. 

문제는 책상이 나무 받침대에 받친 채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이다. 공중에 떠있는 책상. 시작부터 책상의 본래 기능은 없어졌다. 그리고 컴퓨터 선 정리용 구멍은 뚫려있지 않는 책상 상판 위에 올려져 있다. 역시 선이 책상아래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처리되어 있다. 

다른 작업 역시 흔히 접할 수 있는 세 개의 의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의자들은 모두 쓰러져 있었다(무제, 2012).  

다음 작업 역시 자그만 거울이 있는데 구석에 붙어있다. 그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들여다 봤다면 얼굴 한쪽이 심하게 찌부러질 것이다. 거울의 본래 기능은 그의 손길 앞에서 사라지고 왜곡되었다. 

이 세 작품 앞에 선 관객들은 당황할 것이다. 전혀 낯설지 않는 물체들이 자아내는 낯선 풍경 앞에서 어쩔 줄 모를 것이다. 

기성품을 가지고 설치를 하는 작가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정서영은 그 작업을 통해 재료로 쓰인 물체를 넘어서는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점에서 매력이 있었다. 그 분위기는 단순한 심리적인 감성이 아니라 확연히 다가오는 실체적인 공간감이었다. 

사물이 가지는 시각적인 기능에 대한 한계를 넘으려는, 그리고 그 기능만이 전부인양 인식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쾌한 조소가 들리는 듯 했다. 

새로운 공간(또는 관계)에 대한 창조 역시 정서영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매력이다. 때로는 공간-소리-물질이 한데 섞여 관계를 이루며 하나의 새로운 무언가를 형성한다(플레이타임, 2012). 

길거리에 굴러다닐 법한 돌멩이 서너 개가 헤드폰이 놓인 주위에 놓여있다. 관객은 자연스레 의자 위에 앉아 헤드폰을 쓰고 돌 위에 발을 올려놓고 소리를 듣는다.  들리는 소리는 누군가(사운드 아티스트)가 길거리를 걸어 다니며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관객은 자연스레 그들이 걸어 다녔던 그 공간을 소리를 통해 상상하고, 관객-사운드 아티스트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의 묘사와 관객이 밟고 있을 법한 그 돌멩이는 화학작용을 일으켜 관객의 머릿속에 어떤 광경(또는 느낌)을 만들어 낸다. 

재미있는 것은 그 어떤 물리적 접촉이 없음에도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탄생한 그것은 관객마다 다를 것이다. 단순한 돌멩이와 의자, 그리고 헤드폰이 조합한 경우의 수는 관객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정서영이 감독처럼 디자인하고 세팅한 무대에서 무수한 이야기가 만들어 질 것이다.

남들이 지나치는 것에 대한 정서영 작가의 관심을 조금 더 감상적으로 비약해보기도 했다. 소외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연민과 그것에 빛을 비추려는 적극적인 의지로도 읽혀졌다. 

이런 종류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한데, 거울과 의자가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담아내려는 노력이다(밤과 낮, 2011).  

거울은 사람들의 시선이 거의 닿지 않는 천장 구석을 비추고 있고, 의자 위에는 거울의 모양 그대로를 본뜬 형상이 덧대어져 있다. 그 앞에서면 의자-거울-거울 속의 이미지가 하나되어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 누구도 보려 하지 않는 그 곳이 멋지게 미술작업 속에 어우러져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 감동적이었다. 

<마음속으로 정해라, 2012>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여기에서 정서영 작가는 관광객이 미처 누리지 못하고 있는 정자 외부의 멋진 광경을 거울을 통해 정자 안으로 끌어 들여왔다. 

그것은 어떤 공간(특히 관광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한 조소이기도 했다. 그 공간에 녹아 들어가 교재를 하려 하기 보다 그저 한 순간 도장 찍고 왔다 가는 인스턴트성 관계를 지향하는 우리의 태도에 일침을 놓는다고나 할까?  (흠흠. 너무 도덕 선생님처럼 미술을 보는거 아냐?)

어쨌던 나는 이런 정서영의 인간적인 냉소가 매우 흥미롭고 맛이 있었다.

그의 텍스트 드로잉 역시 단어가 주는 이미지 이상의 차원을 형성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 차원이 흔히 우리가 말하는 1차원, 2차원 등의 전형적인 종류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그의 작업 중에 한 문구 "1시 25분에 뚱뚱한 거북이를 만났다"를 보자(괴물의 지도 15분, 2009). 

그것을읽으며 어떤 상황을 자연스레 상상해 봤다. 뚱뚱한 거북이를 나름 만들어 낸다. 그리고 1시 25분을 상상한다. 그리고 내가 거북이와 조인하는 장면을 그려본다. 

문제는 이 장면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도무지 내가 뚱뚱한 거북이 앞에 서있는 장면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드로잉 앞에서 글을 읽고 상상하며 용을 쓰는 내 모습이 웃겼다. 아무 생각 없이 싸질러 놓은 말 한마디, 그것은 드로잉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텍스트로 읽고 있었다.   

다른 드로잉 "우주로 날아갈 때는 코를 빼놓고 간다" 역시 마찬가지다. 정서영은 드로잉에 새겨 넣은 텍스트를 통해 그 단어가 지시하는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자신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어떤 이미지를 글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텍스트는 스케치를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아니지 않았을까? 따라서 그의 드로잉 앞에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작업 자체에 대한 해독이 아니라, 정서영 작가가 구상하는(아니면 구상해가는) 이미지를 빚어가는 그 여정에 대한 공감과 수용, 그리고 관객 나름의 이미지화가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그의 드로잉 연작을 통해 그가 던져놓은 모호한 차원을 어떻게 이미지화 할 것인지도 지켜볼 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연장선상이 <미스터 김과 미스터리의 모험, 2010>이다. 텍스트 드로잉을 연극화한 이 작품으로 우리는 그가 그려놓은 밑그림이 어떻게 조각화해서 표현되는지 볼 수 있다. 

드로잉을 시각화한다는 고정관념은 당연히 드로잉에서 묘사한 것을 시각적으로 동일하게 재현한다는 것일 게다. 당연히 정서영은 그것을 무시하고 전혀 다른 새로운 작업을 만들어 냈다. 그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겠지. 

정서영의 생각의 틀과 표현이 어떤 궤도로 흘러갈지 매우 기대가 된다.

p.s. 이 글을 다 쓰고 난 후에 정작가 작품을 검색하면서 미술평론가 임근준의 두산아트스쿨 강좌 중 정서영 작가와의 대담을 발견했다.http://youtu.be/o4PexrBTw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