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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책] 니꼴라 부리요-관계의 미학(월간이리 2014. 2)

전문은 월간이리 2월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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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구경을 재미있게 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귀동냥을 하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뭔가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들 옆에 살짝 붙어서 이들이 하는 얘기를 듣는 것이다. 이런 부류를 알아보는 것은 조금의 눈짐작만으로도 쉽다. 먼저 대부분 2인 이상이 함께 들어온다(그래도 세 명을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갤러리에 들어왔는데 프론트에 있는 직원이 후다닥 사무실로 들어가서 사장 또는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면, 그 사람 옆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제법 들을 수 있다. 뭐 대부분은 작품에 대한 사교적인 칭찬이 대부분 이지만, 시시하게 보고 넘어갈 전시의 재미를 좀 더한다는 점에서 아직도 애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동시대 미술의 경우는 귀동냥을 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는 애로다. 앞에 섰을 때 “좋다”라는 느낌보다 “이건 뭐지”라는 의문을 남기는 작업이 훨씬 많다. 작업 앞에 선 (업계 종사자가 아닌 일반)관객들이 10초에서 길면 몇 분 사이에 그것을 향유하고 공감하기에는 아는 지식과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빨리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은 마음의 압박 때문에). 

그래서 동시대 미술은 연예인을 좋아하듯 단순한 방식의 팬덤 보다는 어떻게 보면 살짝 오타쿠적인 태도가 필요한 취미이다. 더군다나 한 눈에 읽혀지기를 거부하는 이네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니꼴라 부리오의 ‘관계의 미학’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요리사의 레시피, 회계사 의 세법전처럼 요즘 미술을 잘 ‘읽고’ 싶은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옆에 두고 있을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다. 

니꼴라 부리오는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린다. 부리요는 미술작품의 이미지는 그 자체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 작품 속에 냄비가 하나 있다고 치자. 그 앞에 선 우리는 냄비가 얼마나 정교하게 묘사되었는지, 물감은 어떤 재질인지, 다른 사물들과는 어떻게 배치 되어있는지 같은 눈에 보이는 것만 감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부리요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형태 뿐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이 냄비가 탄생하기까지 요소, 예를 들면 이 냄비는어디선가 짠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어느 캄보디아 깡촌 공장에서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면서 하루에 1불 이하의 월급으로 일하는 12살짜리 어린아이의 피땀이 담겨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화겠지만, 중요한 점은 관계 작가들의 작업 속에는 이미지 이면에 그와 관련된 누군가를 작업 속에 끌어들인다는 데 있다. 

그러나 작업앞에서 눈에 힘주고 무언가 통찰을 발견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이미지로 승부하는 것이 예술일텐데, 이미지에서 공감을 못 얻는다면 그것은 아티스트가 너무 앞서가는 것이거나 관객과의 소통에 방법적으로 부족한 탓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될 테니 말이다(동시대 미술을 보려면 이게 당췌 무슨 놈인지 모를지언정 끝까지 그건 내 탓이라고는 하지 않는 당돌함이 필요하다. 잘 보이면 내가 잘난거고, 아니면 아티스트가 요상하게 만들었다는 그런 철면피적인 태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 부리요의 책은 요즘 미술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부리요는 동시대 미술의 한가지 특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작가만이 제공자 노릇을 했던 기존 미술과 달리 관객도 한 몫 거들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미술에서 관객은 언제나 한 몫을 담당해왔다. 미술이 이 땅 위에 나타났을 때부터 누군가 그것을 봐왔고, 누가 봐 줘야 미술의 존재가치가 있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립서비스에 불과했던 말이었을 뿐 아티스트가 A부터 Z까지 미술품 제작에 관여해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부리요는 요즘 미술에서는 관객이 없이는 물리적인 완성자체가 불가능한 작업이 등장했다고 제시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시장에 음식이 차려져 있고 그것을 먹는 것이 작품자체라면, 관객이 먹지 않고서는 작품이 될 수 없을 것 아닌가(리크리트 티라바니자, 베니스 비엔날레 아페르토 93 설치). 이런 시도는 미술작업 제작 과정 속에 관객을 끌어들여, 미술에서 관객의 역할을 한단계 넓혔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액자에 가려진 작품과 관객과의 관계를 툭 터놓고 둘 사이의 간격을 없애 놓은 것이다. 

한발 떨어져 지켜보기만 하던(觀) 손(客)에 불과했던 관객(觀客)과 친밀해지면서 자동적으로 미술판에서 밀어낸 한 부류가 있으니, 미술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이다. 관계 미술에서는 선택받은 1%의 소유자는 사라지고 99%의 손님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소유되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보러 오는 관객들을 통해 작업을 완성한다는 생각은 지금까지 팔리기 위해 걸려있던 미술품의 개념을 뒤집는 생각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는 편가르기 심보가 약간 들어간 사견이다. 

왜냐하면 부리요는 관계 작가들이 미술품의 물질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단지 소유하는미술, 물질로 존재하는 작업을 보는 것 만이 미술 관람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술 감상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일침을 놓는 셈이다. 그래서 미술은 보는 것이 아니라 만져볼수도 있고 냄새를 맡을 수도 있으며 그 속에 빠져 헤엄칠 수도 있는거야… 이런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 관계 미술의 시작이다. 

관객과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 이들은 자신과의 관계도 새롭게 설정한다. 미술작업에 “내”가 전면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껏 자신의 모습을 그려넣은 “자화상”에 국한되어 왔던 기존 미술과는 다르게 90년대 이후 새로운 경향은 “나”를 미술작업 자체로 삼는다. 내가 작업의 소재가 되니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나를 통해 연인, 사회, 다른 사람, 관객을 얘기한다. 

이렇게 전시 형식을 허물고, 자신에게 둘러쌓인 가림막을 해제한 미술가는 관객 그리고 주위 구성원들에게 손을 내민다. 이들과 작업을 통해 친밀히 엮이고 싶다는 것이겠다. 나에 대한 얘기를 하며, 관객이 나를 더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내가 만든 미술품에 관객이 손 한번 더 내밀어주기를 원하는 그런 상호 작용을 원하는 것이다. 

관객과 작품, 그리고 작가간의 한데 장을 어우르려는 시도는 관객이 작품(작가)을 보고 그냥 지나가면 끝나는 일회적이고 서로 따로 노는 형국이었다면, 부리요의 관계작가들은 관람이 작업이 되는, 작가-관객-작업이 돌고 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마당놀이랑 비슷한 느낌이다. 관객의 추임새와 끼어들기가 자연스레 이뤄지고 하나 둘 경계없는 원안으로 들어가고 그러다 시간이 지나보면 무대 객석 할 것 없이 서로 어울려 노는 그런 광경이 상상되었다. 

관계 작가들이 손을 내미는(관계를 형성하려는) 대상들은 점점 그 폭이 넓어지고 있다. 생면부지의 행인에서 시작하여 특정 장소에까지 관계 작가들이 맺으려는 관계의 스펙트럼은 무궁무진하다. 

한편 관계 미술은 단순히 관계 맺기를 넘어 특정 행동을 유발하는 무브먼트까지 발전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면 탈인종주의, 성적소수자 운동, 환경, 노동, 반전 운동 등 물적, 심리적 동참을 호소하는 관계 작업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관계 미술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으려는 현상은 꽤나 자연스러운 전개로 보인다. 

미술의 사회적인 책임을 진지하게 요구했던 민중미술의 DNA가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나라에서는 그 경향이 조금 더 진하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을까. 시간이 허락한다면 좀 더 알아볼 요량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미술은 열 관객이면 열 모두 다른 해석과 공감을 낳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정 메시지로 귀결하는 미술 작업은 더 이상 재미를 느끼지는 못하기는 하다. 

부리요의 책은 뒷 편에 가면 조금 더 깊은 내용으로 들어가는데 이거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관계 미술… 그리고 부리요…두고두고 같이할 좋은 친구 하나 생겼다. 나 좀 잘 끌고 가주게 말이요, 부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