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처
http://www.wolganmisool.com/200102/article_01.htm
아트포럼 홈페이지
《월간미술》은 날로 급변하는 새로운 미술환경 속에서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오늘도 밤을 지새우는 세계의 미술전문지를 탐방하기로 했다. 1962년 ‘비평가다운 견해를 자유롭게 취할 수 있는 미술전문저널’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창간된 《아트포럼(Art Forum)>을 찾았다. 본지 이건수 편집장이 《아트포럼》의 잭 뱅코우스키(Jack Bankowsky) 편집장과 이메일로 인터뷰를 나누었다.
《아트포럼》 편집장 잭 뱅코우스키는 1962년 아이오와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서 자랐다. 버몬트의 베닝튼(Bennington) 대학을 졸업했다. 작가였던 그는 휘트니 미술관의 인디펜던트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차 뉴욕에 왔다가, 1990년 전시 리뷰를 담당하는 기자로 《아트포럼》에 입사해 1992년부터 지금까지 편집장으로 재직중이다. 1989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앤디 워홀 회고전>의 서문 및 1993년 《아트포럼》의 30년 역사를 기념하는 글을 《아트포럼》에 게재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동안 현재 예일대학 미술사학과 교수인 톰 크로우(Tom Crow)의 제플 월에 대한 글(1993)과 디에터 로스(Dieter Roth)의 죽음 직후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썼던 글(1998)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한다.
정사각형 모양으로 친숙한 《아트포럼》이 곧 창간 30주년을 맞게 된다. 창간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온 《아트포럼》만의 전통이 있다면 무엇인가?
《아트포럼》은 1962년 존 어윈(John Irwin)에 의해 “비평가다운 견해를 자유롭게 취할 수 있는 미술전문저널”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창간되었다. 《아트포럼》의 역사는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초기의 ‘영광의 시대’다. 편집장이었던 필 레이더(Phil Leider)와 존 코플란스(John Coplans)는 가장 명확하고 분명하며 야심에 찬 미래 지향적인 평론을 하는 미술전문지를 만들려고 했다. 당시 《아트포럼》에 기고했던 평론가들은 현재 이 시대의 미술평론, 미술사 영역에서 영향력 있는 저널리스트로 기억되고 있으며, 《아트포럼》은 이들의 기고를 통해 현대미술을 논하는 가장 앞서가는 미술전문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의 멤버 중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 로버트 핀커스-위텐(Robert Pincus-Witten), 그리고 작가였던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의 견해가 도움이 되었고,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도 포함된다.
두 번째 시기는 초창기 소유주였던 찰스 카울레스(Charles Cowles)에게서 영국인 앤서니 코너(Anthony Korner)로 바뀐 후다. 이전과 달리 《아트포럼》을 이른바 ‘수준 높은’예술과 대중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미술전문지로 바꾸었던 편집부장 잉그리드 시스키(Ingrid Syschy)를 채용했던 것도 코너였다.
이후 《아트포럼》은 대중적인 시각문화를 보다 더 많이 다루기 시작했고, 이것은 당시 학계에서 요구하는 흐름에 부합하는 일이기도 했다. 앞부분에 칼럼 섹션이 기획된 것도 이때였다. 전과 달리 무거운 미술평론적인 문장보다 짧으면서도 다양한 주제를 섭렵하는 글들이 실리게 되었다. 당시 출현한 평론가로는 그리얼 마르커스(Greil Marcus)와 허버트 무샹프(Herbert Muschaml) 등이 있다. 현재 무샹프는 《뉴욕 타임스》건축 부문의 최고평론가이기도 하다.
마지막 시기는 내가 편집장이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1990년 전시 리뷰를 담당하는 편집기자로 《아트포럼》에 왔던 나는 1992년에 편집장으로 승진했다. 사실 내가 《아트포럼》에서 일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작년까지도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새로 온 편집기자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지금까지 일한 역대 편집장 중에 내가 가장 임기가 긴 편집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트포럼》을 항상 새로운 곳으로 인식하고 있고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월간지의 성격은 항시 마감에 쫓기다가 곧장 다음 달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순발력이 요구된다.
엄청난 순발력이 요구된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당신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해 달라. 역대 편집장 중 가장 장수하는 비결이 있을 것 같다.
《아트포럼》을 통해 미술계에 적극적으로 몸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아트포럼》의 전시 리뷰 담당의 편집부 기자로 일할 당시, 나는 정식 직원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원래 작가였던 내가 뉴욕에 온 이유는 휘트니 미술관에서 제공하는 작가를 위한 프로그램 때문이었고, 《아트포럼》으로부터 정식직원 제의를 받았을 때에는 이미 관심이 바뀌어 《이스트빌리지 아이(East Village Eye)》, 《플래시 아트(Flash Art)》 같은 소규모 저널에 기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한 사무실에서 하루종일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에 나는 좀처럼 사무실을 떠나지 못했다. 아마 1990년대 대부분을 《아트포럼》 사무실에서 보낸 것 같다.
우리는 시각예술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많은 원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덧붙여 우리의 관심영역을 유지하면서도 미술과 문화 전반을 더 넓게 소개하고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통이 단절된 현대미술에 있어서 커뮤니케이션을 그 사명으로 하는 미술 저널리즘의 중요성이 날로 증대되고 있다. 《월간미술》 역시 동시대 현대미술의 빠른 변화와 미술과 다른 장르 사이의 교감에 대한 감각의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데 부담을 느낀다. 늘 전위적·전투적인 입장을 견지하기로 유명한 《아트포럼》의 편집장으로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가?
《아트포럼》의 편집장이 된 후 《아트포럼》과 내가 두 가지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우리 세대의 새로운 미술을 소개하는 것과 지금까지 가장 널리 읽히고 영향력 있는 국제 저널로서의 《아트포럼》을 계속 성장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퇴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도 창간 당시와는 달라져야만 했다. 또한 미술세계 역시 30년 동안 거대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도 변화되어 있었다. 편집장이 된 후 나는 비록 《아트포럼》이 대중성을 받아들이고, 많은 이익을 남겨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과거처럼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의 글이 실리는 매체라는 생각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나는 발행인들에게 “우리는 지금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저널이다. 하지만 왜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들의 글이 정기적으로 실리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 후 우리는 이것을 곧 시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미술사학자로 미국에서 가장 인정받던 석학 톰 크로(Tom Crow)를 초대했다. 물론 이 진행은 앞에서 소개했던 파니첼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이브 알랭 보아(Yves-Alain Bois), 로잘린드 크라우스, 마이클 프리드, 린다 노클린(Lin- da Nochlin), 페미니즘의 거장 로버트 로젠블럼(Robert Rosenblum), 뒤샹을 좇는 몰리 네스비트(Molly Nesbit), 철학자 존 라으크맨(John Rajchman)을 영입했다. 이들은 이제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평론가가 되었다.
이는 분명 초기 ‘영광의 시기’에 자주 등장했던 중요한 이름들을 다시 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학구적인 내용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새로운 계획이었다. 또한 나는 개성이 강하고 학계와 직접 관련이 없는 평론가들도 섭외했다. 우리는 데이브 히키(Dave Hickey), 《뉴스위크》의 미술담당 평론가였던 피터 플레이젠스(Peter Plagens)를 끌어 왔고, 게리 인디애나(Gary Indiana), 시인이자 평론가인 웨인 코스텐범(Wayne Koestenbaum)도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글을 써 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허버트 무샹프, 아서 단토(Arthur Danto), 그리고 호미 바바(Homi Bhabha)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추구하는 《아트포럼》의 방향은 무엇인가? 그리고 특별히 고집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편집장으로서 내 작업방식, 그리고 원칙은 각기 ‘다양한 분야의 세계 최고를 소개’하는 데 있다. 《아트포럼》은 비슷한 관심과 지성을 가진 평론가를 소개하는 것보다 다양한 목소리가 서로 마찰을 일으키는 것을 독자가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목소리든지 가장 강한 주장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서로 견해가 상반된 평론가들은 《아트포럼》에서 지성적인 논쟁을 벌이길 원했고, 《아트포럼》은 만만찮은 경쟁자들이 논쟁을 벌이는 곳이 되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자기 목소리를 《아트포럼》을 통해서 내보내는 것이 다른 곳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트포럼》은 늘 동시대 미술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있어 왔다. 사실 우리의 경우에는 순수한 목적 하에 진정한 비평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 비추어 보면 비평과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아트포럼》의 30년이 대단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어떤 논쟁의 양 극단을 중재해야 할, 즉 커뮤니케이션의 중재자로서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본다.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하는 비평가, 기자 등과의 관계 역시 중요할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다른 미술전문지에 비해 《아트포럼》만의 특징이 있다면?
우리 같은 미술전문지 편집부의 일이란 자신의 생각을 저변에 깔고서 다른 평론가의 의견과 견해에 귀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편집장은 지휘자가 되어 평론가, 기자들이 함께 일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평론가라고 해서 반드시 나와 같은 견해를 취하지는 않는다. 그들과 내가 공통으로 갖고 있으며 내가 그들에게서 찾는 매력은,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다양한 견해를 강하게 논쟁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아트포럼》이 다른 미술전문지와 차별성을 갖는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을 받아들이고, 적극 수용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대부분을 《아트포럼》의 사무실에서 보낼 만큼 미술과 《아트포럼》을 사랑하는 당신이 느끼는 미술의 매력은 무엇인가?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
‘앤디 워홀’이다. 그는 미술계의 징후들이 출현할 수 있는 길을 미리 찾았다. 그는 자본주의에 물든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가장 제대로 직시한 작가다. 그리고 어떤 작가도 그만큼 자기 앞에 다가온 현실을 직시하며 변화를 추구한 작가는 없다고 본다.
로버트 스미드슨 역시 매력적이다. 그는 필연적으로 미술전문지, 다시 말해 매체들이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프 월은 우리에게 전통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우리가 하는 것 모두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될 수 있고, 전통은 재창조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다시 다가온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특정 작가를 선별해 편식하듯 선호하지 않는다. 위의 사례는 극히 예외다.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 견해일 뿐이다. 《아트포럼》의 견해는 아니다. 《아트포럼》의 입장은 편집부에 속해 있는 한 개인의 견해로 대표될 수 없다. 만약 《아트포럼》의 특정한 입장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기고하는 사람들의 전체 견해가 한데 모아진 것이다.
지난 달 이야기를 나눈 《아르 프레스》의 카트린 미예 편집장도 얘기했듯이, 현대는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이 모호해져가고 있다. 즉 영원히 계속되는 변화 속에 현대미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트포럼》 역시 미술과 다른 장르 사이의 크로스-오버가 어색하지 않게 잘 조화되고 있음을 느낀다. 《아트포럼》이 바라보는 현대미술의 양상은 어떤 것인가?
예술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어떤 혁신적인 기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미술계에서 미술시장을 세계 경제의 흐름과 동떨어진 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처한 어려움은 커뮤니케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대해 이미 결정되어 버린 새로운 정의가 예술이라고 불려도 무방한지,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것을 생각할 가치가 있는지 확신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우리 모습을 재현해 주는 예술이라는 영역이 기술적인 혁신을 통해 미래에 재창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현재 예술 영역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재창조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현대의 디지털 아트는 사진의 처음 단계처럼 새롭고 흥미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사진이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과 같이 변화되었듯이 예술의 종(種)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디지털은 더 탐구되어야 할 영역이다.
현재 《아트포럼》은 다음 3월호에 두 개의 큰 전시를 기획했던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과 휘트니 미술관 큐레이터들의 포럼을 게재하고자 한다. 이외에도 토론을 형성하여 이 이슈에 관해 많은 얘기를 하려고 한다. 이 포럼은 3월에 새로 발표되는 《아트포럼》의 공식 웹사이트와 같이 시작될 것이다. 포럼의 내용은 3월 내내 우리 사이트에서 소개될 것이다.
지금 세계미술의 주요 화두는 ‘디지털’이다. 이에 관해서는 찬반 논쟁 등 의견 역시 분분하다. 개인적으로 미술전문지는 각기 중요하고 다양한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세분화·전문화된 작은 저널은 일종의 포럼 형식을 통해 작가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반면 《아트포럼》과 같은 저널은 좀더 다양한 관객에게 예술에 대한 생각을 전달하며 새로운 생각을 펼치는 일종의 플랫폼으로 이용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본다.
우리의 목적은 좀더 수준 높은 독자에게, 좀더 넓은 안목으로 잘 다듬어진 대화를 열어 주는 창문이 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미술전문지는 사람들이 예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또한 그 주위에서 많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아트포럼》이 단순히 지역적인 미술전문지가 아님을 알려 주고 싶다.
나는 사람들에게 《아트포럼》을 읽으면 현재 미술계에서 진행되는 일을 알 수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다. 이런 바탕에서 작년부터 일 년에 세 번씩 앞으로 개최될 전시를 미리 소개하는 섹션을 운영하고 있다. 평론가들이 전시를 미리 소개해 주는 이 섹션을 읽는 독자들은 현재 전세계에서 관심이 집중될 만한 전시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우리를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와 《아트 뉴스(Art News)》 등 다른 미술전문지와 구분짓는 것 같다. 다른 미술전문지는 우리에 비해 정보를 중립화한 후 소개하는 것 같다.
또한 우리는 1996년부터 ‘북 포럼(Book forum)’을 통해 책 리뷰를 시작했다. 《아트포럼》을 구독하는 사람들은 일 년에 네 번씩 북 포럼을 읽을 수 있다. 《아트포럼》의 서적부에서 나오는 북 포럼은 새로 출간되는 책들에 대해 심도 있는 논단을 형성하며, 또한 가상 소설 부문은 매번 중요한 작가들에 의해서 편집된다.
정리·윤동희 기자 / 현지 진행, 사진·우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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